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시앵 레짐 (문단 편집) == 종교 ==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[[가톨릭]]의 세력이 매우 강한 국가여서 가톨릭과 [[개신교]] 간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. 프랑스의 개신교는 하급 귀족들과 상인 계층의 지지를 받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주요 근거지는 프랑스 남서부와 [[노르망디]]였다. 그러나 이 지역들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였고 신교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. 따라서 신교도, 즉 [[위그노]]들은 국가의 [[통일]]을 해치는 요소로 보아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, 위그노들도 불리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적인 [[독일]]이나 [[네덜란드]] 신교도들과 자주 동맹을 맺었다. [[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]]이나 프랑스 종교 전쟁이 그 예였다. [[앙리 4세]]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종교 전쟁은 일단 끝났다. 앙리 4세는 [[낭트 칙령]]을 발표하여 신교도들과 가톨릭 교도들간의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고, 소수인 신교도들을 위해 8개의 무장 도시를 허가하는 등 군사적인 자유권도 보장했다. 그러나 군사적인 권리가 [[시간]]이 갈수록 점차 남용되었고 나중에는 [[프랑스 왕국]]에서 분리독립을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. 이렇게 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[[1628년]] [[라 로셸]]을 포위공격하여 함락하고, 그 결과로 맺어진 조약에서 종교적 자유는 그대로 보장하는 대신 군사적인 자유는 박탈하면서 신교도 세력은 위축되었다. 1610~[[1635년]]에 이르는 기간동안 프랑스의 남부지방에서는 일련의 [[내전]]이 계속해서 일어났다. 처음에는 라이벌 귀족 가문간의 싸움으로 보았으나 연구를 더 진행한 결과 이는 종교분쟁으로 밝혀졌다. 프랑스 종교전쟁이 종식되고 [[낭트 칙령]]이 발표된 뒤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. [[루이 14세]]는 신교도들에게 더욱 강경한 대책으로 일관했다. 처음에는 [[선교사]]를 보내 개종하도록 했다. 이 때는 개종을 하는 자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을 주었다. 그 다음에는 형벌을 부과하고 신교도들의 [[학교]]를 폐쇄하였으며, [[직업]]에 종사치 못하게 했다. 나중에는 [[용기병]] 부대를 보내 신교도들의 집을 약탈하게 해서 강제로 개종시키려 시도했고 이는 낭트 칙령의 폐지 ([[1685년]] [[10월 18일]])로 이어졌다. 이 사건으로 인해 신교도 18만 명이 프랑스를 떠나 [[영국]]과 [[네덜란드]], [[독일]]과 [[남아프리카]] 등지로 이주했고, 약 4천명은 [[미국]]으로 떠났다. 이렇게 떠난 신교도들은 [[상인]], [[학자]]와 같이 사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었기에 [[프랑스]]에겐 뼈아픈 손실이었다. 다만 나머지가 그대로 죽거나 한 건 아니고 무늬상 개종한 것으로 보이면 더 문제삼지 않았기에[* 사실 이건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순수주의 떠들기 전의 [[스페인]]도 마찬가지였다. 다수의 [[무슬림]]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뒤에서는 [[이슬람]]을 믿는 게 보였지만 눈감아줬고, 이들 중 상당수는 스페인 외의 [[유럽]] 땅에서 그대로 받아줬기에 이후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 자들도 많다.] 대부분 명목상 가톨릭이고 실제로는 신교도였다. [[프랑스 혁명]] 이후 각종 [[차별]]이 철폐되자 이들 대부분은 다시 신교도가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